서 론
국내에서 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관리가 제도적 틀을 갖 추고 시작된 시점을 일제강점기(1910-1945)로 본다면 우 리의 보존역사는 대략 10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20세기 전반에는 식민정부에 의해 서 자주적인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체계적인 보존관 리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실질적 관점에서 본 다면 한국의 보존역사는 해방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세기 정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문 화재 보존분야는 제도와 정책, 학술연구, 인력양성 등의 양 적인 측면에서 단기간 내에 크게 성장하여 왔다.
전대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토대로 이제는 보다 질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하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무엇 보다 문화재보존분야의 내·외부에서 질적 성장을 요구하 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문화재 보존에 대한 철학적 당위성, 그리고 판단의 합리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내 부적으로는 문화재청이 수리기술자 시험과목으로 보존원 칙과 보존윤리를 포함시키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그에 비 해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성과는 미 진한 편이다.
지금까지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에 대한 국내에서의 연 구와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분야에 대한 논의는 출발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는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의 개념과 필요성 등 학문적 연구 의 토대를 형성하는 기초적인 사항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제 2장에서는 현 시점에 대한 진단을 통하여 문화재보존분 야에서 질적 성장이 왜 필요하며, 왜 보존철학과 보존윤리 를 질적 성장을 위한 핵심요소로 보아야 하는지 서술하고 자 한다. 다음으로 제 3장에서는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하여 용어의 개념과 속성, 이들 분야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에 대하 여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 4장에서는 앞으로 보존철 학과 보존윤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정책수립 에 반영하고, 현장에 적용하기 위하여 보존의 핵심주체인 국가기관 등 행정기관을 포함하는 관계, 대학이나 전문연 구기관 등 학계, 그리고 현장에서 보존처리를 수행하는 전 문업체 등 업계에서 추진해나가야 할 사항을 제언하고자 한다.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의 역할과 필요성
일반적으로 문화재 보존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 야 할 요건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행정적·법 적 절차와 제도이다. 둘째는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 축적되 는 다양한 정보와 지식이다. 그리고 셋째는 문화재를 직접 적으로 보존처리하는 전문인력이다. 해방 이후 이러한 요 건을 갖추어 온 과정과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행정적·법적 제도의 측면에서 보면, 1962년 「문 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40여 년이 지난 200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문화재 종류별로 또는 문화재를 대상으로 하 는 행위별로 법을 분리하여 효율적인 문화재 보존과 관리 체계를 갖추어 왔다. 특히 2010년에는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행위규정을 별도의 법으로 분리하였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의 보존행 위에 대한 절차, 보존전문업체에 대한 자격과 행위요건 등 을 규정하고, 이를 통해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 고,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리와 보존처리가 이루어 지도록 하였다. 법적인 측면과 함께 보존관리를 위한 예산 이 증가하였으며, 박물관, 연구소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기 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문화재관련법의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철학적 토대와 기초는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문화재보호법」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동 법 제2조에서는 문화재의 핵심속성을 ‘역사적 · 예술적 · 학술적 및 경관적 가치’로 규정하고 가치를 지정과 보존의 범위 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하위 법령이나 지침에 구체적으로 각 가치의 개념 과 평가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동법 제3조에서 는 문화재의 보존 · 관리 및 활용의 기본 원칙을 ‘원형유지’ 로 제시하고 있으나 원형의 개념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정의된 바 없다. 그 외에도 보존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절차인 예산배정에 있어서 우선순위와 보존의 범위를 결 정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사항 에 대하여 주관적·임의적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로 보존관리를 위한 정보와 지식 축적의 측면에서 보면, 보존처리에 필요한 세부 분야별로 과학적이고 체계 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큰 성과이다. 관 주도로 설립된 국가기관이 과학적인 장비와 시설을 갖추고 발굴에서 쏟 아져 나온 유물, 개인 소유의 국가지정문화재나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에 대한 연구와 보존처리를 활발하게 하고 있 다. 이를 통해 물리·화학·생물 등 순수 과학 분야에 의존해 왔던 보존은 ‘문화재 보존과학’으로 독립하였다. 이 과정 에서 문화재의 재료와 제작기법을 이해하고 보존처리를 위한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개발하는 등 전문적인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 결과,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미술사나 건축 사 등 인문학적 측면에 한정되었던 것에서 벗어나 연구 범 위가 재료와 기법 등 과학적 측면에까지 확대되면서 문화 재에 대한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되 었다. 2017년에는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회에 보존전문가 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제는 지정단계에서 과학적 정 보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고, 보존처리에 있어서도 과 학적인 분석은 필수요건이 되었다. 그러나 철학적 고민 없 이 과학적 정보만으로는 판단의 합리성을 보장하기 어려 움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철학 간에 균형 있는 발전이 이루 어지지 못하였다. 특히 보존의 모든 과정에 필요한 합리적 인 판단기준은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보존처리 후 결과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을 때 재료나 방 법선택 등 판단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기준을 명확하게 제 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셋째로 전문인력의 양성 측면에서 보면 1990년대 이후 문화재 관련 대학의 설립이나 전공학과의 개설을 통해 문 화재의 물질적인 측면을 연구하고 보존처리하는 전문인력 을 체계적으로 양성하여 왔다. 그로 인하여 국가기관에서 는 행정·연구 등 분야별 인력을 균형있게 갖추게 되었다. 또한 현장에서 손상된 문화재를 보존하는 전문회사가 크 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공적 산물인 문화재를 대상으로 하 는 공적 행위에 있어서 보존가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과 자질이 무엇이며, 전문가로서 주어진 책임을 수행 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고민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그 결과 전문지식이나 오히려 보존을 위한 물리적 개입이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여 보존처리가 오히 려 문화재의 손상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상 종합하면 현재까지 보존분야는 양적인 측면, 그리 고 하드웨어적인 틀을 갖추는 데에 주력해 왔다고 볼 수 있 다. 상대적으로 보존원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한국의 문화와 전통기술이 고스란히 담긴 우리 문화재의 특성과 성격에 적합한 방식과 판단기준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Lee, 2003). 외국의 원칙을 피상적으로 적용하거나 한편에 서는 서구의 물질주의 관점에 입각한 국제적 원칙은 우리 문화재에는 적용하기 어렵다고 속단하여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 보존처리의 질적 수준에 대하여 관련분야 밖에서 쉽게 평가하기도 하고, 문화재 보존분야의 전문성 을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보존에 있어 서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거나 부정적인 비판이 등장할 때마다 의사결정과 보존처리를 맡은 전문가는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최근 제기된 구례 화엄사 사자석탑 해체보수, 강진 월남 사지 석탑 해체보수, 해남 미황사 대웅전 천불도 보존처리, 충주 미륵리 절터 보수 등의 사례는 우리의 문화재보존에 있어서 그간 간과해 온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에 대한 고민 이 이제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 해 결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은 문화재의 보존 의 질적 수준은 행위를 위한 원칙의 적절성, 원칙을 적용하 도록 하는 정책과 제도의 구현, 그리고 의사결정에서부터 보존처리까지의 과정전체의 합리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 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행정절차를 이행하였다고 해서 보존 처리로 인해 문화재의 가치가 하락하였는데도 이를 정당화 하거나 보존처리의 결과에 대하여 잘잘못을 일부 전문가나 특정기관에게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정책의 근간이 되는 개념과 원칙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제도적 틀과 과정을 통해 전문가가 합리적 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재 보존을 위한 보존철학, 보존원칙, 보존윤리에 대 하여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할 외부환경적인 요인도 있다. 국 제적으로 보존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논의가 시작 된 지는 100여 년이 넘었으며, 새로운 헌장이 등장할 때마 다 그 내용에 있어서 기초를 이루는 철학적 담론은 깊이를 더하고 있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유럽의 다수 국가들은 보존윤리지침을 제정하여 이를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뿐 만 아니라 보존의 질적수준을 판단하는 법적 근거로 적용 하고 있고, 시대적 흐름에 맞게 지속적으로 개정·보완하고 있다(NRICH, 2010). 이러한 국제적 동향에 맞추어 2010 년부터 2012년까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윤 리지침에 대한 기초연구를 통해 「문화재 보존가를 위한 윤 리적 지침」을 제정하였다(NRICH, 2012). 또한 숭례문 부 실공사 논란 이후 수리제도 개선대책의 일환으로 문화재 청은 수리기술자 자격증 시험에 공통과목으로 ‘수리론’을 신설하여 보존원칙과 보존윤리에 관한 전문지식을 평가하 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CHA, 2017). 이를 위한 기초연구 가 2017년에 완료되었으며, 올해에는 수리론 교재에 대한 초안을 작성하고 몇 년 내에 수리기술자 및 기능자 시험에 서 보존원칙과 보존윤리에 대한 이해 여부를 평가할 계획 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에 대한 이 해와 연구, 그리고 실천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분야이다.
다음 장에서는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 전개에 앞서 이들 용어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그 개념과 두 용어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의 개념,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
3.1 보존철학의 개념과 주요 내용
보존철학의 개념을 이해하기에 앞서 문화재의 기본 속 성과 보존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화 재와 보존을 이해하는 기본 요소인 ‘가치’, ‘공물’, ‘최대한 의 정보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 등도 함께 이해하여야 한 다. 이들은 보존철학과 보존윤리의 개념을 형성하는 기초 적 지식이자 토대이기 때문이다.
먼저, 문화재를 단순히 인류 또는 자연의 역사적 활동에 의하여 생성된 물리적·정신적 산물로 보는 것은 특정 측면 만으로 문화재를 규정하는 관점이다. 문화재의 가장 근원 적인 속성은 역사적 결과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이 지니고 있는 유·무형적 가치에 있다. 이러한 가치는 문화재를 향유하는 주체인 인간이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 으로써 과거에 문화재가 탄생할 때에 생겨난 가치와 당대 의 사회적·문화적 성격에 맞게 부여된 새로운 가치를 모두 포함한다. 과거-현재-미래 등 전 세대가 지속적·반복적으 로 문화재가 지닌 가치를 인식하고, 유지하고, 활용하고, 후대에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문화재는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동시에 시대를 넘어 상속되는 유산 이다(Lee, 2017). 이와 함께 문화재는 공간적으로는 인류전 체, 시간적으로는 모든 세대를 위한 유산이므로 시공간적 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공적가치를 지닌 산물이다. 그러한 관점을 적용하여 국내 현행법에서는 문화재를 공 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공적 속성으로 인하여 개별 문 화재의 법적 소유권은 특정인이나 기관에 있지만 그것의 상징적인 소유권과 향유권은 공공에 있다.
다음으로 보존은 공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를 대상으로 하는 행위이므로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은 공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하는 것에 행위의 목표를 두어야 하며, 보존을 위한 모든 판단이나 의사결정 은 개인의 주관이나 일부 특정인의 한정된 전문지식에 의 존하기 보다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다양한 전문 지식과 관 련정보를 최대한 수집하여 다수가 합의하는 방식으로 이루 어져야 한다. 이를 ‘최대한의 정보와 논리적 사유를 통한 합 리적 판단’이라고 한다. 또한 문화재가 세대 간에 전달하는 유산이라는 점에서 보존행위는 어느 한 세대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순환적·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검증된 방법과 논리적인 분석을 통하 여 문화재가 지닌 가치를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고, 당대 의 사회적 동의를 받아 가치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최선 의 방법을 선택하며, 다음세대가 현재적·잠재적 가치를 최 대한 향유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철학은 사유의 과정이자 사유를 위한 방법론이다. 그러 한 관점에서 보면 보존철학은 문화재를 대상으로 하는 보 존이라는 행위의 개념과 속성에 대해 연구하여 문화재 보 존의 당위성과 원칙을 세우는 과정이자 방법론이다. 궁극 적으로 보존철학은 보존에 필요한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지식과 합리적 판단을 위한 기준과 원칙, 그리고 방법을 제 시한다.
보존철학에서 학문적으로 주로 다루는 것은 ‘왜, 무엇 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등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다(Lee, 2017). 여기에서는 문화재를 왜 보존해야 하는지,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적으로 보존 할 것인지, 또한 문화재의 다양한 무형적·유형적 측면 중에 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목 표, 방식, 원칙을 적용하여 보존해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고민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해진 답이나 정형화된 판 단공식은 없다. 사안별로 논리적인 사유과정을 통해 합리 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핵심이다. 보존철학은 그러한 합 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고의 틀이며, 동 시에 논리적인 사유 과정이다.
먼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문화재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 보존철학의 주된 관심사를 ‘가치’에 두고 있는 것은 문화재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문 화재를 보존해야 하는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존의 당위성으로 늘 주장해온 조상의 얼과 정신,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서의 의미 등은 모두 문화재의 가치에 해당한다. 그러한 가치는 현행 「문 화재보호법」에 명시된 역사적, 미학적, 학술적 가치 등 문 화재의 탄생과 동시에 생겨나는 본질적 가치 말고도, 당대 의 평가과정에서 부여하는 정서적 가치, 사회경제적 가치, 종교적 가치, 희소성으로 인한 가치와 같은 파생적 가치 등 매우 다양한 가치가 존재한다. 개별 문화재에 대해 이러한 다양한 가치들을 조목조목 파악하고, 그 가치의 중요도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철학적 탐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로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 도 ‘가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의 단계에서 파악한 다양 한 가치들은 바로 보존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 어, 어느 사찰을 보존해야 한다면 그 사찰이 지니고 있는 불교사에 있어서의 역사적 가치, 개별 또는 전체적인 아름 다움을 표현하는 미학적 가치, 사찰에 적용된 기술적 측면 등의 학술적 가치 외에도 한국인의 공통된 전통사상을 형 성하는 측면, 주변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평화로운 분위기 등의 사회경제적 가치 등 다양한 가치가 보존의 대상이 된 다. 때문에 이들 각 개별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한 문화재의 수많은 물질적·정신적 측면이 무엇인지 파악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의 핵심 은 ‘원형유지’에 있다. 문화재가 지닌 가치를 구현하고, 가 치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문화재가 지닌 유·무형적 측면이며, 그것이 문화재의 원형이다. 가치의 구현과 유지 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형태, 재료, 기술, 위치, 주변환경 등 유형적인 측면과 예술성, 장인기술, 기법, 제작의도, 사용 목적에 따른 기능, 느낌 등 무형적 측면이 모두 원형을 구 성하는 요소이자 원형을 판단하는 요건이다. 이들을 최대 한 유지하는 것이 원형유지이며,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방 법을 찾는 것이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 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앞서 파악한 다양한 가치를 구성 하는 요소를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재에 축적된 다양한 시 대적 층위들을 모두 보존해야 한다든지, 전통 재료를 사용 해야 한다든지, 손실부분은 복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 다든지, 문화재의 가치판단과 활용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후대에 재처리하게 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보 존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든지, 당대의 기술과 재료가 완 벽하지 않으므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소한으로만 보존처리한다든지 등 문화재 보존에 적용할 원칙을 세우 게 된다. 이러한 세 단계의 철학적 사유과정을 통해 도출된 결과물이 바로 보존원칙이다.
3.2 보존윤리의 개념과 보존철학과의 관계
일반론적으로, 그리고 가장 간략하여 보존윤리를 정의 하면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 ‘보존에 임하는 태도 와 자세’이다. 그러한 태도와 자세는 문화재에 대한 전문지 식과 능력을 갖추고 공적 속성을 지닌 산물의 다양한 가치 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하여, 주어진 여건 속에서 관련 정보 를 수집하여 해당문화재의 가치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선 택하여 궁극적으로는 문화재의 가치를 보존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와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 보존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보존가는 문화재를 대 상으로 하는 모든 행위와 판단과정에서 이러한 사항을 늘 염두에 두고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존가가 하는 모든 행위는 공적 산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행위이기 때문에 행위 과정과 결과가 공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도 록 전문가로서의 태도와 자세를 유지하여야 한다. 보존가 가 보존윤리를 실천하여야 문화재가 지닌 가치를 최대한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다.
보존윤리의 개념은 보존철학-보존원칙-보존윤리 간의 관계를 이해하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보존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간혹 이들 세 용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 지만 이들은 서로 차별화된 개념이다. 서로 연관성은 있으 나 각각의 고유영역이 존재한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보 존철학은 사유하는 과정이자 방식이다. 특정한 문제나 주 제에 대하여 탐구하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면서 그 과정을 해나가기 위한 사유방법이다. 철학 적 방법을 적용하여 사유를 통해 도출된 결과물을 구체적 으로 정리하면 보존원칙이 된다. 보존철학의 마지만 단계 인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보존원칙의 출발점 이다. 왜, 무엇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사 유를 토대로 전체 또는 개별 문화재의 보존여부에 대한 판 단기준과 물리적 개입의 범위,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설정 하면 보존원칙으로 그 형태를 갖추게 된다. 보존윤리는 철 학적 사유를 통해 도출된 보존원칙을 실천하기 위한 보존 가의 자세와 태도이며, 그것을 작업과정에서 실천하는 방 법이다. 특히 보존철학-보존원칙-보존윤리는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기보다는 보존원칙과 보존윤리의 근간에 보존철 학이 기초적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존원칙 을 수립하고 보존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통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 간의 관계를 정리하면 Figure 1과 같다.
보존가가 보존윤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서 술한 것을 윤리지침 또는 윤리규범이라고 한다. 서구의 경 우 이미 1960년대부터 보존윤리규범을 제정하여 보존기술 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고, 보존담당자의 공 적책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지침을 마련하고, 이 를 현장에서 실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NRICH, 2011). 또한 이러한 지침마련을 통해 보존가가 전문직업인으로서 정당한 사회적·법적 지위를 지닐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많은 이들이 윤리규범을 사 회적 통념으로 판단하는 도덕적인 잣대나 행위의 결과를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윤리규범은 보존가가 문화재와 보존행위가 지닌 공적 속성을 염두에 두고, 가치를 최대한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수립된 보 존원칙을 잘 준수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직업적 규범이 다. 그러므로 잘잘못을 따지는 데에 사용하기 보다는 전문 가로서 보다 수준 높은 직무수행을 도와주는 적절한 방법 을 제시하고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하여야 한다.
2012년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제정한 「문 화재보존가를 위한 윤리지침」(NRICH, 2012)은 철학적 측 면을 토대로 정립한 보존원칙을 보존가가 어떠한 자세와 태도, 기준을 가지고 실천해야 하는지 41개의 조항으로 명 시한 지침이다. 그 세부 내용과 과정에 대해서는 관련 책자 (NRICH, 2011; 2012)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 에서는 그 내용에 대한 서술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윤리지 침은 국외의 윤리규범에 대한 연구와 내용분석을 토대로 우리보다 앞서 윤리규범을 제정한 국외사례에서 나타난 유용한 방향과 문제점을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적합한 윤 리규범의 틀과 내용으로 초안을 구성하였다. 완성본은 국 립문화재연구소,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 중앙박물관 등 주요 기관의 보존가들이 함께 논의하고 수 정하여 정리되었다. 이 윤리지침은 보존가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보존의 각 과정별로 반드시 고려하 여야 할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통제적이거나 강압적 관점이 아닌 자율적이며 자아성찰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존가가 갖추어야 할 태도와 자세는 문화재의 개념 과 속성, 가치에 대한 판단, 새로운 재료와 기술 등 보존과 관련한 생각과 실천을 위한 환경이 변화되면서 그에 맞게 지속적으로 진화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보존분야에서 전 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 모두가 윤리지침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개정을 위한 개선방향을 함께 고민하 여야 할 것이다.
결론 : 정책적·학술적·실천적 과제와 제언
문화재 보존은 합리적 판단을 위한 사회적 과정이다. 문 화재가 지닌 가치를 이해하고, 보존하고, 향유하는 세 단계 의 과정은 순환적이며, 반복적으로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공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를 대상으로 지 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과정에 참여하여 의사결정과 행위를 이행하는 주체는 국가기관, 연구자, 실행자 등 관계 -학계-업계의 기관과 전문가들과 일반 대중이다. 그러므로 보존철학에 대한 연구와 이해를 토대로 보존윤리를 잘 실 천하고, 이를 통해 문화재보존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이들 세 주체가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첫째로 국가기관에서는 정책기조의 토대에 철학적 담 론을 담아내야 한다. 정책적으로는 보존철학과 보존윤리 를 연구하여 모든 의사결정과정과 보존처리에서 실천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이에 필요한 자원과 재원을 지 원하여야 한다(Lee, 2015). 단순히 문화재를 보존처리하는 수리기술자와 수리기능자 시험에 보존원칙과 보존윤리에 대한 과목을 신설하는 것만으로 보존윤리를 실천하는 법 적·제도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법에 명시된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의 기본원칙인 원 형유지에 대한 조항이나 문화재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경관적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와 이를 판단하기 위한 구체 적인 지침을 마련하여야 법적·제도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 을 것이다.
둘째로 학계는 보존철학과 보존원칙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여야 한다. 법과 제도라는 틀을 만들고 정비하기 위하 여 필요한 전문지식과 연구 성과를 제공하는 것은 학계의 몫이자 역할이다. 외국의 경우 보존학은 보존의 인문학적 측면, 즉 미술사와 보존을 위한 철학적 담론을 연구하는 분 야와 문화재의 물리적 측면을 연구하는 과학적 분석과 재 료개발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재 보존에 있어 서 문화재의 종류별로 특징과 속성, 그리고 다양한 가치를 보다 명확히 제시하고, 그에 적합한 보존방법과 판단기준 을 제시하는 데에 필요한 인문학적 연구를 보다 적극적으 로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재 보존을 위한 의사결정과 과학적 분 석과 보존처리에 종사하는 행정가와 현장전문가는 연구 성과에 대하여 숙지하고 보존윤리를 자신의 업무에서 실 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여야 한다. 학 계와 관계에서 아무리 바람직한 행정적 틀과 보존원칙을 수립하였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그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다면 문화재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윤리지침을 숙지하고, 실천하며, 개정을 위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