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언
우리나라의 마을굿은 기원전부터 있어 온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며, 대동굿, 부군당굿, 도당굿, 별신굿, 당산굿 및 당굿 등 다양하게 불리며 전래되어 왔다. 이는 마을 단위의 굿으로 유교식 제사나 농악 또는 풍물과 함께 대동의 형태를 보인다. 행당동아기씨당은 서울굿의 원형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마을굿인 아가씨당굿을 연행하는 사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Kwon, 2009; Seoul Museum of History, 2006).
행당동아기씨당은 옛날에 이곳에 공주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하자 세상을 비관해 출가하지 않은 채 앓다가 죽게 되어 동네사람들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는 것에서 알려져 왔다(Lee, 1979). 그러나 이는 행당동아기씨당의 구비역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아기씨당은 2001년에 성동구의 향토유적이 되었고, 예로부터 사당 주변에 살구나무가 많아 행당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Seongdong-gu, 2024). 또한 행당동아기씨당의 당굿(대동굿)은 서울시 무형문화유산으로, 사당의 무신도는 서울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적 및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행당동아기씨당은 당고지기가 7대를 이어오면서 아기씨당의 전반적인 관리와 제주를 계승하고 있다. 아기씨당에서 연행되는 당굿은 할머니와 어머니 대를 이은 현재의 당주무녀와 그녀의 장녀에 이르기까지 혈연으로 4대째 전승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당동아기씨당의 보존형태는 마을제의가 남아 있는 다른 곳과 차이가 있으며, 주민들과 함께 이어온 뿌리 깊은 구비역사는 오랜 세월을 거친 변화와 교체과정을 반영하고 있어 전승적 가치도 높다.
그러나 서울은 지속적으로 도시화를 통해 발전해 왔고 여기서 파생된 변화는 마을제당의 소멸과 토박이들의 이주로 인해, 마을제의가 담고 있던 지역의 역사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행당동아기씨당 또한 일제강점기에 왕십리로 19나길 29-18(행당동)로 강제 이전되었으며, 또다시 2018년에는 아기씨당 터가 행당제7구역 재개발정비사업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2020년에 철거 된 이후 현재 재개발구역 내에 복원 중이다.
이 연구에서는 행당동아기씨당이 여러 차례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유지하며 성동구 향토유적으로 인정받는 유산적 가치와 아기씨당이 보유하고 있는 무형 및 유형문화유산의 전승과정과 보존상태를 살펴보았다. 또한 지역의 재개발에 따라 다시 이전 복원된 이후 문화유산으로서 보존 및 계승의 방향성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논의하였다.
따라서 우선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 확보를 위해 활용되어 왔던 행당동아기씨당의 전통적 요소와 기능이 무엇인지를 검토하였다. 두 번째로는 도시정비 또는 재개발 이후 행당동아기씨당의 보존방향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세 번째로는 행당동아기씨당에 내재되어 있는 미래유산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 결과는 도시재개발 과정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원형과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사례로 마을문화유산을 보전하고자 하는 공동체와 구성원 및 관계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행당동아기씨당이 마을 고유의 정서를 담은 지역문화로서 역할을 유지하고 미래세대에게 문화유산의 공동체적 순기능을 전승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2. 구비역사와 지역사적 특징
2.1. 구비역사
행당동아기씨당은 서울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인 부군당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Kwon, 2009). 이는 진퍼리살군당, 살군당부인마마 또는 왕십리아기씨당 등으로 불려 왔으며 현재는 행당동아기씨당으로 칭하고 있다(Ko, 2006; Kwon, 2009).
진퍼리살군당이라는 이름은 아기씨당 일대가 조선시대 초부터 질펀한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진펄리 또는 진팔리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살군당부인마마는 사당 주변에 살구나무가 유난히 많아 다른 아기씨당과 구별하기 위해 불린 명칭이다(Seongdong-gu, 2024).
행당동아기씨당에는 신당의 주신인 아기씨를 모시게 된 서사를 담고 있는 좌정담과 신의 영험담 등이 마을의 내력과 함께 세대를 거쳐 당신화로 구비전승되어 왔다. 이는 현재의 3대 당주무녀가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구비역사이다. 또한 대를 잇고 있는 장녀인 4대 부당주무녀에게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이를 간단히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북쪽에 있던 나라가 망해 공주 다섯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오시게 되었는데 왕십리까지 내려와 몇 해 동안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셨대요. 그러다 찔레꽃이 피는 봄이 되자 산 찔레꽃을 따서 먹다 입에 물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차츰 왕십리에 정착하면서 한두 채씩 집이 생기고 마을이 형성되자 촌장과 같은 사람들의 꿈속에 아기씨가 나타나서 당신의 한을 풀어줄 것을 당부하였지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을에 전염병 등의 불상사가 자주 발생하게 되었고 그제야 꿈을 이상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은 사당을 짓고 마을신으로 모시게 되면서 마을이 평화를 찾았다고 해요. 이때 당을 세 군데 지어서 행당동아기씨당과 양지당에 각각 한 분씩을 수풀당에 세분을 모시고(중략), 살군당으로 불리던 우리 아기씨당에서는 음력 4월 보름에 아기씨탄신제를 음력 10월 초에는 마을 대동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좌정담을 통해 아기씨당의 최초 건립 시기를 마을이 형성된 시기와 맞물려 유추할 수 있으며, 이는 마을의 정체성과 더불어 무가역사의 또 다른 연구과제이다. 세 군데에 당을 짓고 왕십리 일대에 다섯 분의 아기씨를 모신 구절에서는 두 군데 당의 내력이 드러난다(Kwon, 2020). 현재 양지당은 소실되었고 수풀당은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행당동아기씨당의 영험담은 현재 부당주무녀의 구술과 왕십리 주민들에게도 전승되어오는 내용으로, 이를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아기씨가 마을사람들에게 현몽하셔서 사람들이 무신도를 반닫이에 숨겼다가 난이 평정된 후 가마로 모셔왔다고 해요(부당주무녀 사설). 6.25 때는 인민군이 당에서 잠을 자면 설사를 하거나 탈이 나서 도망갔다고 합니다(부당주무녀 사설). 왕십리에 살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못 살고 다시 돌아온대요(마을사람 사설). 아들 못 낳은 여인이 노그메를 짓고 삼색 과일과 예단을 바쳐 정성을 드리면 효험을 보였어요(마을사람 사설).”
위와 같은 증언 외에도 여러 영험담이 마을사람들과 당주무녀로부터 전승되었으나, 어떤 이가 사당의 앞뒤에 말의 피를 뿌린 이후부터 아기씨당의 영험함이 사라졌다고 전해온다. 이렇듯 좌정담과 영험담의 구비역사가 지역의 유래를 뒷받침하며 전해져 온 것은 행당동아기씨당이 혈연계보로 계승되어 정통성을 이어온 결과라는 것을 후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2. 지역사적 역할
선행연구에서는 행당동아기씨당을 부군당으로 구분하였으나(Kwon, 2009), 부군당은 뛰어난 무신 등의 부군신을 주신으로 모신다. 그러나 행당동아기씨당의 주신은 호구신인 아기씨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과 굿거리의 형식 또한 다른 부군당과 차이가 있어, 이 아기씨당만의 차별성을 살펴보았다.
좌정담에 언급된 찔레꽃이 천연두를 앓다 죽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해 아기씨를 호구신으로 분류하였고(Ko, 2006; Kwon, 2020), 아기씨 호구신이 좌정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Kwon(2009)은 아기씨당의 지역적인 특징으로 설명하였다. 아기씨당이 위치한 왕십리는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시신들이 나오는 광희문과 인접한 곳이었다. 따라서 죽음이 끼치는 부정을 두려워해 광희문과 가까운 왕십리 일대에 마을당을 지어 백성들의 불안함을 달래고자 했던 것으로 보았다.
과거 왕십리에 속하던 신당동 일대는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었고, 무속인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서민들의 의료기관인 활인서도 조선 후기에 이곳 신당동으로 이전되었다. 활인서에서는 유교를 표방하던 조선이 의약의 혜택에서 소외되었던 민간의 병자구료를 무녀들에게 시행토록 하였다. 이는 이 지역이 항상 질병과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굿을 통해 사람들의 정신적 안정을 도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Byeon, 2020; Choi et al., 2021).
왕십리 일대에서 호구신을 주신으로 모신 아기씨당은 이러한 지역적 배경을 가진 지역사적 특성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죽음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부정과 액을 막고자 하는 마을사람들의 의지가 접목되어 행당동아기씨당을 매개로 공동체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래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문명이 발달하며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무속신앙 속의 무당은 여느 민가에서도 볼 수 있었고 한 시대의 풍류이면서 민초들 고통의 대행자이며 문화였다. 삶의 애환을 무당과 함께 풀어가며 살아온 옛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동안 큰 의지이며 바램의 대상이었다. 행당동아기씨당은 힘없는 백성들의 기원과 기도처인 곳이다 (Resident Committee of Haengdang 1-dong, 2014)”
위와 같은 서사구조는 행당동아기씨당굿의 아기씨거양거리 중 공수의식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2014년 행당1동주민자치위원회에서 발간한 ‘행당동이야기’에서 아기씨당을 소개한 내용을 보면, 이러한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3. 보존상태와 유산적 가치
3.1. 행당동아기씨당
행당동아기씨당에는 유형과 무형의 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으며(Table 1), 사당은 성동구 보호조례에 따라 2001년에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최초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으로 추정되며, 당에 걸려 있는 아기씨당봉건기(阿祈氏堂奉建記)의 기록(Figure 1)에 따르면 1747년(영조 23) 이전으로 전해져 온다(Lee, 1979). 그러나 이 기록은 검증이 필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이 아기씨당은 1900년대 초까지 현재의 왕십리민자역사 부근에 있다가 성동우체국 앞으로 옮겼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들의 탄압에 시달리다가 1947년 성동구 행당1동의 현재 위치에 새 신당을 지어 이전했다. 이는 당시 당주무녀의 꿈에 아기씨가 나타나 그의 뜻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사당은 전면 두 칸에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을 한 목조 기와집이며, 당의 좌측에는 당주무녀의 살림집이 있다. 아기씨당 내부에는 무신도와 각종 무구가 있으며 마당에는 건립 시기부터 이전할 때마다 옮겨졌던 오층석탑이 있고, 대문의 서쪽 옆에는 서낭당으로 섬겨지는 신목이 있다(Figure 2).
3.2. 행당동아기씨당굿
행당동아기씨당굿은 적어도 276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서울의 대표적인 마을 대동굿이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4; Encyclopedia of Korean Folk Culture, 2024). 서울특별시는 2005년 1월 10일 아기씨당굿을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이 당굿이 주민의 안녕과 결속을 위하고 대동의식을 고취시켜 온 서울의 마을 굿으로 전통성과 예술성 등이 전승 및 보전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고시하였다(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05).
행당동아기씨당굿은 1부에 유교식 제례를 올리고, 2부에는 굿거리를 진행하며 굿의 마지막에는 수팔련꽃을 태워 액을 예방하는 의식을 한다(Ko, 2006). 이와 같이 행당동아기씨당은 선행연구에서 부군당으로 구분하였지만, 다른 부군당굿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부군당굿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굿거리 중 군웅거리는 없고 아기씨거양거리가 포함되며, 이는 행당동아기씨당굿의 핵심적인 굿거리이다(Figure 3).
아기씨당굿의 거양거리는 당주무녀에게 현신한 아기씨가 몸단장–북향사배–도량돌기-거성춤을 행한 후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아기씨당과 마을의 역사를 구술하며 축원한다. 이어 마을사람들 개개인의 내력을 소통한 후 그들의 액막이 공수를 한다. 이 거양거리에서는 아기씨당 굿거리 중 대신말명거리의 구술과 함께 이어져 지역과 제관 및 마을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당주무녀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기억으로 증명된다(Figure 3).
3.3. 행당동아기씨당무신도
행당동아기씨당의 무신도 일괄 16점은 2017년 4월 13일에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Table 2). 서울시는 이 무신도의 민속문화유산 지정고시에서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다(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17).
행당동아기씨당 무신도는 전통 탱화와 신경향의 탱화가 만나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구한말 탱화의 영향을 받아 다양하고 흥미로운 도상들이 많다(Figure 4). 대부분 화승의 필법과 도상적인 특징이 강하며, 특히 1912년 작으로 알려진 산신도 1에는 무신도로는 드물게 기년명이 있고 시기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근대기 서양화풍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Figure 4P).
따라서 이 무신도들은 오랜 역사를 지닌 아기씨당과 함께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현재 행당동아기씨당에 봉안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의 지정조사 보고서에서는 21점의 무신도를 모두 4개의 범주로 분류하였다(Table 2). 이 중에서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16점이고(Table 2A∼ 2C, Figure 4), 나머지 5점(D그룹)은 현재 심사 중이다.
대부분의 무신도는 무녀가 사망하면 태워버리는 것이 관습인데 행당동아기씨당은 가계로 보존이 이어지면서 무신도도 세대를 거쳐 계승되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아기씨당의 무신도들은 변색 등 부분적인 손상을 입었으나 2019년에 보존처리되어 보관하고 있으며(Seongdong-gu, 2019), 안료분석과 함께 채색기법 등 과학적 분석이 진행 중이다.
4. 보존방향과 전승적 의미
4.1. 보존방향
현대의 도시재개발 과정에서 문화유산보존은 당연하면서도 크게 침해되고 있는 이해상충의 평행선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은 전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도시의 역사적 요소를 현대의 문화적 상징과 디자인 등으로 연계할 필요가 있다(Seo et al., 2010).
행당동아기씨당과 당신화는 왕십리 일대의 도시디자인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현대적 문화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지역의 전통과 문화유산은 진정성 등 고유한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에 도시정책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행당동 일대의 도시재개발과 문화유산보존의 방향은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정체성과 마을의 문화자산을 지키고자 하는 미래가치에 대한 이해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는 문화유산이 지향하는 진정성의 유지행위가 될 수 있으나, 재개발 이후 보존되는 문화유산은 또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다. 가장 핵심은 문화유산과 관련한 관리와 보존에 대한 책임이다. 서울 송파의 잠실주공 5단지에서 있었던 역사성 보존을 위한 재건축 흔적 남기기 사업에 대한 정책 철회의 이유 중 하나가 남겨진 유산에 대한 관리체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Han, 2022).
또한 2009년 성동구의 천년고찰인 안정사가 훼철되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대웅전 철거 때 드러난 마애불과 명문 및 약사불은 현장을 조사했던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2010년 6월 29일에 성동구 향토유적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이며 유명무실해진 사례도 있다.
행당동아기씨당은 최근까지 여러 번의 이전과 철거 및 복원 등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무허가 철거 및 재개발과 관련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행당어린이공원이 들어서는 도시정비 과정에서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서도 아기씨당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당고지기를 겸하며 가계를 계승하는 현재 당주무녀의 부단한 헌신적인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현재 도시재개발사업이 한창인 행당동 일대에서 아기씨당 철거 이후 복원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사례는 추후 도시변화 속에 존폐 위기에 있는 문화유산보존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은 행당동아기씨당보존회의 노력과 마을사람들의 모임인 지역공동체의 협력으로 가능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관리체계가 마련되어 아기씨당의 복원이 진행 중이며, 무신도의 보존 및 전시와 함께 당굿의 계승을 위한 전수 등 교육시설을 갖춘 전시관이 건축되고 있다.
향후 행당동아기씨당을 안정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지역문화유산으로서 아기씨당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 새로운 도시문화와 융합되어야 하고, 시대적 가치를 새로 정립하는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치단체의 정책적 지원과 계승자의 사명감 및 노력과 연구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형성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지역공동체가 기여해야 함은 분명한 일이다.
4.2. 전승체계
대동굿과 의례 및 기도를 수행하는 행당동아기씨당은 오래전부터 관리를 위해 당고지기가 있었으며, 서울의 다른 부군당과 달리 현재까지 가계계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굿은 관리주체에 따라 주도권이 결정되며, 당고지기의 거처는 당에 있거나 다른 곳에서 생활하다가 굿 날에 당을 찾는다. 그러나 행당동아기씨당은 무신도를 비롯하여 당의 터가 모두 당주무녀의 소유이다. 그녀는 6대째 당고지기도 겸하며 퇴락해 가는 아기씨당을 지키기 위해 모두 매입하였다.
현재 당고지기 또한 전승으로 이어져 당의 관리와 제주 역할 등을 총괄하고 있다. 이 당고지기의 계보는 행당동아기씨당의 굿거리 중 대신말명거리에서 구술되고 있다. 또한 아기씨당봉건기에 등장하는 고송자의 친정이 당고지기로 있다가 고송자가 무녀가 되면서 당고지기를 겸하게 되었음도 구전된다(Kwon, 2009; 2020). 이후 고송자의 며느리로 이어져 그녀의 딸인 현재 당주무녀가 당고지기를 겸해 왔다. 이후 2016년부터 행당동아기씨당보존회에서는 역할을 분리해 당주무녀의 차녀가 7대 당고지기가 되면서 초기의 당고지기 형태를 계승하였다.
행당동아기씨당굿은 당주무녀와 당주악사가 전수생과 이수자를 배출하며 대동굿을 연행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대동굿의 아기씨거양거리와 대신말명거리를 실행하는 당주무녀는 지역과 주민의 구비역사와 변천과정을 알고 있어야 공수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서사는 다음 대의 당주무녀에게 함께 전승함으로서 아기씨당굿은 반드시 세습 당주무녀에 의해 실연되어야 한다. 현재 당주무녀는 3대째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7년부터는 이수자인 장녀가 4대 부당주무녀로 아기씨당굿을 연행하고 있다.
현재의 당주악사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아기씨당의 당주악사는 마포 일대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한 만신인 고모의 영향을 받아 무속음악을 시작하였고 14세부터 정통 서울굿의 무악을 학습하였다. 그는 행당동아기씨 당굿의 무악에서는 주로 피리를 맡지만, 대금과 해금 및 호적을 연주하기도 한다(Yang, 2018).
4.3. 보존 및 전승적 의미
행당동아기씨당은 서울지역의 다른 마을당과는 달리 사당은 성동구의 향토유적이며 무신도 16점과 당굿은 서울시의 민속문화유산 및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지역사적 의미와 함께 학술적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현재 사당은 원래의 자리에서 근거리로 이전해 복원되고 있으나 앞으로도 지역의 정체성과 기능을 유지하며 보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아기씨당의 무신도 16점은 현재 서울시에서 지정심사 중인 5점과 함께 보존처리가 완료되어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이들은 전시관의 개관에 맞춰 부분적으로 공개하며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장시설도 구축되어 있다. 따라서 무신도의 활용과 교육 및 보존을 위한 체계를 수립해 향유 기반을 마련해 가야 할 것이다.
한편 마을제의의 일환인 마을굿은 오랜 시간과 지속적인 사회변화 속에서도 유지되어 공동체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는 마을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계방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염병과 같은 초월적인 사태에 대한 두려움을 합심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의 산물이다.
서울의 마을굿은 도시와 농촌 및 사회적 계층 간의 문화적 다양성이 있고, 신성과 세속이 결합되어 있으며 놀이와 제의의 성격을 함께 보여주는 축제적 성격을 갖는다(Hong, 2012). 행당동아기씨당굿도 지역의 정체성과 본유적 정서가 스며있는 마을제의와 문화로 주민들이 소통하는 축제였으며 애향심과 민족애의 근원이 되어 단결과 통합의 의지를 내재 시켜왔다(Figure 5).
또한 행당동아기씨당은 장기간 마을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역할도 해왔다. 아기씨당의 역사문화적 기능과 대동적 가치는 당굿의 아기씨거양거리와 대신말명거리에서 구술적으로 증명되며, 2006년과 2022년도의 재개발로 당시 성동구청에 제기했던 당주무녀의 민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간단히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일제 말에 일본인들이 사당을 옮기라고 성화하며 독촉해 그에 못 이겨 지금 자리에 옮기고 동네 유지들과 할머니 고송자 씨가 1947년도에 사당을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중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모든 종교와 무속행위는 군중심리를 선동한다고 탄압하고 못하게 해도 우리무녀와 동네 어른들께서는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 놓고 물장구라도 치며 행사를 하였기에 일본인들은 악착같이 이를 못 하게 하며 사당 옮기기를 독촉하여(중략), 사당을 지은 지 4년 만에 육이오가 나서도 유실은 없었습니다(후략).”
이와 같이 과거 사람들은 마을굿을 놀이와 축제로 삼으며 개인의 행복과 마을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교류의 장으로 활용해 왔다(Figure 5). 행당동아기씨당굿에서는 유교식 제례가 끝나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점심 식사를 나누고, 이어 지역의 대표자가 참여하여 대동굿을 한다. 굿거리를 마친 후에는 당주무녀가 마을사람들과 정담을 주고받으며 굿상 음식도 모두 같이 나눈다.
굿거리가 시작되면 마을사람들은 신장기를 뽑고 무녀의 공수를 통해 운수를 점치며, 참석자들이 굿판에 들어와 장구와 피리 장단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는 축제의 장을 펼친다(Encyclopedia of Korean Folk Culture, 2024). 이러한 아기씨당굿의 대동정신은 살아있는 유산으로 재창출 과정이 연구되고 미래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행당동아기씨당은 사당이 복원되고 전수를 겸한 전시관을 새로 개관한 후에도 마을주민과 신세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역문화와 유산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해야 하며, 시대에 부합하는 가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행당동아기씨당은 토속신앙과 무속을 초월하여 서울의 마을공동체 문화유산으로 계승해 미래세대와 함께 도시의 지역정체성을 유지해 가야 할 의무가 있다.
5. 결 언
행당동아기씨당이 성동구의 향토유적이며, 아기씨당굿과 무신도가 서울특별시의 무형 및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이를 보존하고 전승해야 한다는 특별한 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당동아기씨당의 유산적 가치에는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가계계승의 구조로 이어지는 관리와 전승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당동아기씨당굿도 마을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서사적인 구비역사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 왔다. 이 당굿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대도시의 주민들을 화합하고 단결시키는 사회통합적 역할을 해왔으며, 굿판에 참여하여 함께 즐기는 마을축제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도 보존가치가 높다.
행당동아기씨당은 지역정체성과 고유성을 지닌 전통 문화로서 긍정적 의미가 있으며, 지역의 미래문화 형성과 차세대에게도 필요한 살아있는 문화이다. 따라서 행당동아기씨당과 관련한 유형 및 무형의 문화유산은 마을의 과거와 미래를 연계하며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전승해야 할 당위성을 가진다.
그러나 대도시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문화유산과 전통을 보존하는 데는 마을 공동체의 공감대는 물론 책임감 있는 관리주체와 소유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관리 소홀로 인한 행당동아기씨당 문화유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도시의 변화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보존시스템이 필요하며,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문화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유지해 올바른 향유와 전승에 기여해야 한다.